특집: 증산도 역사의 실체 6부 (월간 천지공사 제26호) > 싼도의 실체

본문 바로가기

싼도의실체

특집: 증산도 역사의 실체 6부 (월간 천지공사 제26호)

쾌도난마
2022-03-30 23:26 443 0 0 0

본문

[수부 고 부인을 안운산의 연원 주로 받들려면 운산이 이청음의 연비가 될 수 밖에 없어 ]

 안경전이 1988년 1월 30일 낸 증산도성전, 158쪽에 있는 '증산도 법통의 삼천성도표(三遷成道表)'를 보면 바로 눈에 띄는 것이 '고수부님의 1변 교운개창 앞뒤에 있는 공백기간이다.
고수부가 1변을 개장했다는 주장에서 1909년~ 1911년 간의 2년과 1933~1936년간의 3년에 걸쳐 명칭을 붙여 주어야 하는데 이 표에는 그것이 없으니 형식적으로도 합리적인 도표가 되지 못했다.
안운산 안경전부자는 남주 이정립의 저서 '고부인신정기의 세 살림 설'을 그대로 이끌어다가 아래와 같이 표시했다.

[세살림의 교단시대]

첫째살림교단시대(1911-1918) 정읍 대흥리

둘째살림교단시대 (1918-1931) 김제 조종골

세째 살림교단시대(1931~1933) 김제 금산

안경전은 '대도문답, 81쪽에서 고수부의 세살림 교단시대 끝에 고부인이 김제 금산의 용화동에서 도맥을 안운산에게 전했다고 아래와 같이 강변하고 있다.

’1번에서 2번 교운의 계승과정인데 2번 교운은 고수부님께서 셋째 살림을 전수하신 용화동에서 계승됩니다. 그리하여 해방 이후에 2변 부흥시대를 맞이하였는데 이때 교단 개창의 주역이 바로 운산종도사입니다.
 
 당시 이상호형제는 이미 60대에 접어든 노인이 되어 명목상 교단의 대표자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경전은 고수부가 용화동에서 누구에게 도맥을 전수하였는지를 밝히지 않았는데 고부인신정기와 증산교사에는 고수부가 도맥을 이청음에게 전해준 사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미(辛未1991)년 7월 그름에 동화교(東華敎 통정(統正) 이상호등이 조종골에 가서 고부인을 뵙고 여쭙기를 ‘듣사오니 대성께서 사모께 세살림을 하라 하시고 또 여러 종도들에게 용화동이 내터니라 하셨다 하시므로 제가 무진(戊辰1928)년 동지에 여러 교우들과 함께 용화동에서 동화교를 창건하고 그 이듬해 기사(己巳1929)년 3월 16일 대순전경을 편찬하여 진법의 기초를 정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더니 이제는 대성의 육순회갑을 당함에 비로소 사모께서 세살림을 차릴 도수가 된듯하오니 청컨대 사모께서 용화동으로 법소(法所)를 옮기심이 옮을까 하나이다.’ 하니 고부인이 허락하고 먼지 대순절에 대성의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에 가서 회갑치성을 올리고 동지치성 후에 용화동으로 아주 이사하였다. (증산교사 276쪽)

계유(癸酉1993)년 가을에 옥구지방 교인들이 협의하여 옥구에 있는 오성산(五聖山)에 수양소를 짓게 하고 동지치성 후에 고부인이 오성산으로 이거 하려고 떠날 즈음에 남주 이정립을 불러들여 영정 앞에 꿇어 업드리게 하고 영정개사와 저술과 도장건축과 단주수명(丹朱受命)등 후사에 대하여 이 세번씩 다짐을 받은 뒤에 영정을 잘 받들라고 부탁하고 용화동을 떠났으며 을해(乙亥1935)년 10월 5일 밤에 선화 하였다.

안운산은 고부인이 선화한 때 14세의 소년 이어서 고부인을 직접 뵈온 일도 없고 특별히 징표될 만한 것도 받은 것이 없으니 고부인의 도맥이 용화동에 전수되고 그 도맥의 줄기에서 안운산이 일을 크게 했다는 말을 하려면 안운산은 도조증산 - 수부 고부인 - 이청음의 도맥을 인정하고 이청음의 연비가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이상호형제는 명목상의 교단 대표자였다고 한 안경전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안운산은 고 부인이 선화할 때 14세의 소년이어서 고부인을 직접 뵈온 일도 없고 특별히 징표 될 만한 것도 받은 것이 없으니 고부인의 도맥이 용화동에 전수되고 그 도맥의 줄기에서 안운산이 일을 크게 했다는 말을 하려면 안운산은 도조증산 - 수부 고부인 • 이청음의 도맥을 인정하고 이청음의 연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안운산이 출교될 당시의 대법사의 교직은 종사(宗師) - 사성(司成) - 찬교(贊敎) - 교정(敎正) (水火金木등 4인) - 교령(敎領)(122인) - 종리(宗理) - 종감(宗監) 등으로 되어 있어 교정(敎正) 정도의 교직에 있었던 안운산이 남주 이정립등 여러 간부의 보좌를 받고 있었던 청음 이상호를 명목상의 대표자였다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 당시의 교단 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0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