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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普天敎) 보광(普光)에 기록된 ‘지는 것이 이기는 것’

백제의꿈
2021-05-30 20:09 396 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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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천사(天師)께서 매양 제자(弟子)를 가르치시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하셨다. 대저 『짐』과 『이김』은 사람의 생활에 두 가지 큰 방면이요 또 그 법칙(法則)이다. 사람의 모든 생활의 절반은 『짐』이요 절반은 『이김』이다.

 

정치계(政治界)도 『짐』과 『이김』의 반석기요, 경제계(經濟界)도 『짐』과 『이김』의 반석기요, 사상계(思想界)도 『짐』과 『이김』의 반석기요, 종교계(宗敎界)도 『짐』과 『이김』의 반석기다. 우리 사람은 물질생활(物質生活)에도 이 법칙(法則)을 피하지 못하며 정신생활(精神生活)도 이 법칙을 피하지 못한다. 개인도 그러하고 사회도 그러하다. 세계(世界)란 것은 이 『짐』과 『이김』의 뒤석기요, 역사(歷史)란 것은 이 『짐』과 『이김』의 모은 발긔(그물의 옛말)이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生物)도 다 이 법칙을 도망치 못한다.

 

이러한 뜻으로 생명(生命)이이란 것은 『짐』과 『이김』의 두 가지 분자가 합하여 이룬것이오 따라서 우주(宇宙)란 것은 이 『짐』과 『이김』의 한 큰 뭉치를 갈머두는 큰 곳집이다. 우리 사람은 모두 이 큰 법칙에서 살고죽고 한다. 그러나 지는 동시에 이기며 이기는 동시에 지지는 못한다. 저울에서 한 머리가 내려가면 다른 한 머리는 반드시 올라가는 것과 같이 내가 이기면 다른 사람이 반드시 지고 내가 지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이긴다.

 

그런데 『짐』이란 것은 쇠잔(衰殘)과 부심과 죽음과 멸망(滅亡)이요, 『이김』이란 것은 생존(生存)과 흥망(興亡)과 확장(擴張)과 창성(創成)이다. 지는 마당에는 눈물과 슬픔이요, 이기는 마당에는 웃음과 즐거움이다. 지는 때에는 낙망(落望)과 고통과 불행(不幸)이요 이기는 때에는 안락(安樂)과 영광(榮光)과 행복(幸福)이다. 개인이 지면 그 개인은 참담한 실패(失敗)로 없어질 것이요 사회가 지면 그 사회는 그 생명을 더 계속할수 없으며 개인이 이기면 그 개인은 일대영화(一代榮華)를 누릴 것이요 사회가 이기면 그 사회는 한량없는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그럼으로 생물학에 지는자를 저주(詛呪)하여 열패자(劣敗者)라는 명정(名旌)과 도태(淘汰)라는 만장(挽章)을 주고 이긴자를 찬양하여 우승자(優勝者)라는 방목(榜目)과 생존(生存)이라는 상장(賞狀)을 주었다. 그럼으로 세상 사람은 『짐』을 악마(惡魔)같이 미워하고 『이김』을 금옥(金玉)같이 좋아한다.

 

보리이삭의 노래(맥수가:麥穗歌)를 들을 때와 땅에 털나지 아님을(地不毛)을 맹세하는 곡조를 들을때는 누가 은(殷)나라와 조(趙)나라의 『짐』을 슬퍼하지 아니하며 큰 바람의 노래(大風歌)를 들을 때에 누가 한(漢)나라의 『이김』을 하례(賀禮)하지 아니하랴. 리소(離騷)의 글과 우희(虞姬)를 이별하는 노래는 뒷 사람으로 하여금 목메암울 깨닫지 못하게하며 오산에 말멈추는 시(입마오산제일봉:立馬吳山第一峰)는 뒷 사람으로 하여금 어깨춤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렇게 『짐』을 미워하고 『이김』을 좋아함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온 천하(天下)가 모두 『이김』의 깃발을 바라고 달음박직을 쉬지 아니하는데 천사(天師)께서는 오직 『짐』을 가르치심은 무슨 까닭인가? 천고역사(千古歷史)는 『이김』의 기록(記錄)이 아닌가? 우리 사람의 문명(文明)은 『이김』의 꽃이 아닌가? 생물(生物)의 진화(進化)는 『이김』의 총적(總積)이 아닌가? 모든 생활의 이상(理想)은 『이김』의 화관(花冠)이 아닌가? 『짐』에는 역사(歷史)도 없고 문명도 없고 진화도 없지 아니한가? 『짐』에는 생명이란 것은 한갓 분자(分子)와 원자(原子)의 뭉실거리는 푸른 연기뿐이며 우주란 것은 한갓 공막한 공간(空間)과 흐르는 시간(時間)뿐일 것이 아닌가? 역사(歷史)의 모든 경험(經驗)은 우리의 본능(本能)을 편달(鞭撻)하여 『이김』을 배우기에 주저하지 못하게 하여 모든 철인(哲人)과 학자(學者)들은 혹은 글로 혹은 말로 『짐』을 저주하고 『이김』을 찬미(讚美)히여 우리의 정신을 인도하고 『이김』을 배우기에 의려(疑慮)를 둘 겨를이 없게 하지 아니하였는가?

 

아니다. 천하(天下)는 『이김』을 배우다가 크게 실패하였다. 정치로 『이김』을 배우다가 결국 세계를 비린 피로 단장하였고 경제(經濟)도 『이김』을 배우다가 세계는 굶어죽는 백골(白骨)무덤을 이루웠다. 모든 문명은 『이김』의 해독(害毒)을 받아 그 새로운 생명을 잃어버리고 모든 생활은 『이김』의 해독(害毒)을 받아 그 건전한 거름을 잃어버렸다. 돌과 돌이 부딧치면 남는 것은 부서지는 현상(現像)뿐이요. 피로 피를 씻으면 남는 것은 붉고 더러운 채색(彩色)뿐이라. 천하(天下)가 모두 『이김』을 배움에 그 『이김』과 『이김』이 서로 부딧히는 곳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비참한 실패뿐이다. 그럼으로 『짐』을 저주하고 오직 힘의 만능(力萬能)을 주장하여 초월(楚越)한 사람의 나라에 가려하던 『이김』의 철인(哲人) 니체는 필경 비참한 자살(自殺), 가련(可憐)한 뉘우침으로 그 나중을 마쳐버렸다. 그럼으로 천사(天師)께서는 과거(過去)의 모든 사람의 『이김』에 대한 교훈을 부인(否認)하시고 우리에게 오직 『짐』이라는 큰 군략(軍略)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짐』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지려는 짐』이요, 하나는 『이기려는 짐』이다. 또 『이김』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이기려는 이김』이요, 하나는 『지려는 이김』이다. 그러나 『지려는 짐』과 『지려는 이김』 두 가지는 곳 『짐』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이김』과 『짐』이니 우리 생각에 한 개념(槪念)으로 성립 될수도 없고, 사람의 사회(社會)에 실상(實相)으로 나타날 사실(事實)도 될수 없다. 그럼으로 오직 『이기려는 짐』과 『이기려는 이김』 두 가지 곳 『이김』을 목적으로 하는 『이김』과 『짐』이 이 문제의 정신이요 또 사람의 생활의 실상이다.

 

『이기려는 이김』은 지나간 몇천년 동안 우리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여온 법칙(法則)이요, 『이기려는 짐』은 천사(天師)께서 비로서 가르쳐주신 교훈(敎訓)이다. 또 천사(天師)께서 저주하신 『이김』은 나중의 『이김』 즉 목적의 『이김』이 아니요, 처음의 『이김』 즉 방편(方便)의 『이김』이며 천사(天師)께서 가르치신 『짐』은 나중의 『짐』 즉 목적의 『짐』이 아니요 처음의 『짐』 즉 방편의 『짐』이다.

 

대저 『이김』은 강포(强暴)와 교만(驕慢)과 조급(躁急)의 합한 것이요 『짐』은 온유(溫柔)와 겸양(謙讓)과 인내(忍耐)의 합한 것이다. 강포의 다음에는 방자(放恣)요 조급(躁急)의 다음에는 타락(墮落)이다. 온유(溫柔)의 다음에는 관서(寬恕)요 겸양(謙讓)의 다음에는 안정(安靜)이요 인내의 다음에는 흥분(興奮)이다. 잔인은 도움을 잃고 방자는 지혜를 잃고 타락은 용맹을 잃는다. 관서(寬恕)는 도움을 얻고 안정은 지혜를 얻고 흥분은 용맹을 얻는다. 도움을 잃은 뒤에는 고독(孤獨)이요 지혜를 잃은 뒤에는 혼미(昏迷)요 용맹(勇猛)을 잃은 뒤에는 비겁(卑怯)이다. 도움을 얻은 뒤에는 기세(氣勢)요 지혜를 얻은 뒤에는 명철(明哲)이요 용맹을 얻은 뒤에는 과강(果剛)이다.

 

고독과 혼미와 비겁의 결합은 참담(慘憺)이며 암흑(暗黑)이며 패멸(敗滅)이오, 기세와 명철과 과강의 결합은 길창(吉昌)이며 광명(光明)이며 승리(勝利)이다. 그럼으로 『짐』과 『이김』은 한 저울의 두 곳이다. 먼저 높아진 것은 뒤에 반드시 낮아지며 먼저 낮아진 것은 뒤에 반드시 높아진다. 즉 『이김』의 필연한 귀결(歸結)은 『짐』이요, 『짐』의 필연한 귀결은 『이김』이다.

 

고구려(高句麗) 정승 창조리(倉助利)가 봉상왕을 유폐(幽閉)하여 죽이고 미천왕(美川王)을 세운 뒤에 자기의 공을 믿고 자긍과 오만이 날로 높아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는지라. 명철한 미천왕(美川王)은 도저히 위력으로 억제하지 못할줄 알고 가까운 궁속(宮屬)과 관리(官吏)들에게 명(命)하여 창조리를 볼 때마다 공손한 절과 그 공로를 찬양하는 인사를 그침이 없게 계속 하라하고 왕도 또한 창조리(倉助利)가 조현(朝見)할때에 여러 관료들과 더불어 함께 찬양하는 인사를 쉴세없이 거듭 거듭 계속하니 첫날과 다음날에는 창조리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의기가 양양하고 기고만장 하더니 사흘날부터 수심한 얼굴로 점점 그 인사 받기를 싫어하는 기색이 있고 그 후로는 일부일 자긍하는 기운이 차차 감(減)하여지고 오만한 기운이 점점 떨어지다가 열흘차 되어서는 드디어 사람을 대하지 못하고 문밖에 나가기를 꺼리어 필경 병(病)이 났다 청탁하고 손님을 사절하더니 수십일 후에는 다시 온공하고 겸양한 태도로 나와서 일을 봄에 이제는 다시 전날 보던 창조리(倉助利)가 아니였다 한다.

 

또 수나라 임금 양광(수양제:隋煬帝)이 군사 삼십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옴에 기세가 당당하여 당적할수 없는지라.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칠만의 적은 군사로 대적할세 거짓 일곱번 패하여 달아난 뒤에 항복하겠다는 글을 보내고 다시 군사를 돌이켜 크게 쳐서 완전한 『이김』을 얻으니 이 싸움에 수나라 군사 삼십만명은 모두 청천강에서 함몰하고 도망하여 살아간자가 겨우 이천칠백명이요 양광(수양제:隋煬帝)는 단신으로 도망하였었다.

 

또 불란서 황제 나폴레옹이 뇌정(雷霆)같은 위력으로 러시아를 치니 러시아 황제는 나폴레옹을 대적함이 십분 위태함을 알고 드디여 돌을 말키고 천리(千里)를 패하여 나폴레옹을 모스크바 뷔인성에 꾀여 들인 후 불을 놓아 크게 이김에 만고영웅 나폴렝옹은 그 마지막 운명의 첫째 막을 열게 되었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모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인 역사적 실례(實例)이다. 대저 『짐』이라는 무기(武器)의 아래는 적은 것이 큰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나니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天下)의 지극히 굳센 것을 부수어트린다 하였다.

 

그럼으로 천사(天師)께서 『짐』을 가르치심은 곧 우리에게 주위에 있는 모든 강한 대적을 부서트리고 큰 『이김』의 면류관을 얻을 비단 주머니속에 비밀한 꽤를 주심이다. 러시아 철인(哲人) 톨스토이가 저항하지 말라는 주의(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를 주창한 후로 세계는 그를 숭배하고 그 주의(主義)를 다투워 배워 점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진리(眞理)로 향하여 나아간다.

 

이 진리가 창명되는 날이라야 우리 사람의 생활을 비로소 고귀한 한가지를 얻을 것이요, 문명은 비로서 건전(健全)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우리 교(敎)는 본래 천사(天師)의 교훈인 『짐』의 반석위에 기초를 세우고 이 『짐』의 요로부터 모든 교무(敎務)를 집행(執行)한다. 개인의 덕성(德性)도 『짐』을 근거하여 함양(涵養)하고 교우(敎友)들 사이의 모든 관계도 『짐』을 근거하여 맺어왔으니 십오년(十五年)이란 긴 세월을 지나도록 교우(敎友)들 사이에 법정의 송사가 없었으니 그 현저한 실례이다.

 

또 안에 대한 교무도 『짐』을 근거하여 처리하고 밖에 대한 교무도 『짐』을 근거하여 처리하여 왔다. 십오년(十五年) 동안 밖에 대한 관계를 보면 처음에는 비소(誹笑)와 조롱과 업수히 여기는 희롱이 빗발치듯 하였다. 그 비소와 조롱과 희롱이 끄치고 우리 교(敎)는 점점 민중화(民衆化)하자 관헌(官憲)의 무수한 핍박이 뒤를 이어 드디어 모진 바람과 거친 물결에 싸여버렸다. 또 관헌의 모든 핍박이 점점 개이고 우리 교(敎)는 차차 사회화(社會化)하자 사회의 공격이 다시 뒤를 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모든 비소와 조롱과 희롱과 관헌의 핍박과 사회의 공격이 모두 아침 햇빛에 이슬 풀리 듯함은 진실로 『짐』으로서 모든 반대를 대하는 큰 힘의 표현(表現)이다.

 

이렇게 『짐』은 우리 교(敎)의 근저(根底)인 동시에 정신이며 권위이다. 이 정신이 발양되는 곳에 우주의 생명은 새로운 기운(機運)을 얻을 것이요 이 권위가 떨치는 곳에 세계의 문명은 새로운 광명(光明)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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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백제의꿈님의 댓글

백제의꿈
2021-05-30 20:10
몇몇 글자는 도저히 해석이 잘 안되어 그대로 쳤습니다. 옛말이라 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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